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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
안형식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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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04-04-07 (수) 1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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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추천: 0 ㆍ조회: 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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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IP: 211.xxx.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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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자신의 교회와 민중신학의 만남, 최형묵 발췌]
한국인 자신의 교회와 민중신학의 만남
[기독교대한복음교회 목회자정의평화행동 가을 총회 강연] - 2003년 9월 29일(월) 오후 1시 / 경남 함안 명덕복음교회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대표 / 한신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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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자신의 복음교회와 민중신학의 만남>
0. 변명
몇 달 전에 부탁을 받고 각오를 단단히 했다. 『최태용의 생애와 신학』이라는 책을 만드는 데 일조했던 경험도 있고, 또 임 목사가 요청하는 데야 한번 작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제에 최태용 신학을 깊이 들여다보고 개인적으로도 정리를 하고, 그 결과가 복음교회 동지들에게도 유익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물론 한편의 글을 완성한다는 각오였다.
그런데 그만 하나님이 방해(?)하고 말았다. 기장총회에 문제가 터졌다(목사의 서열화를 정당화하는 '헌법 제55조 5항 개정안' 문제). 이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시작한 것은 1월부터였는데 여론화가 되지 못하다가, 7월에 각 노회의 수의 결과가 집계되면서 뜨거운 쟁점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7월말부터 저 지난 주까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며 온통 그 문제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 때 내가 계속 끼고 다닌 책이 『최태용의 생애와 신학』이었다. 그만큼 오늘 강의에 대해 부담을 갖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차분히 앉아 소위 '연구'할 틈은 나지 않고 걱정만이 앞섰는데, 번뜩 계시처럼 다가오는 느낌이 있었다. "머리로 하지 말고 몸으로 해라!"
최태용 목사가 품은 뜻이 다른 것이 아니다. 부조리한 교회를 타파하는 일이 곧 그 뜻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임 목사와 통화하면서 새로운 교회, 독립교회연합을 말하기도 했다. 하여간 변명 치고 장황했다. 그러나 창백한 논리와 개념으로 최태용의 사상을 재단하고 쥐꼬리같은 어떤 교훈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이 아마도 공통적으로 처한 현실을 확인하면서, 이 자리에 함께 한 복음교회 동지들과 마음으로 몸으로 뜻을 같이한다는 충정으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1. "한국인 자신의 복음교회와 민중신학의 만남"의 의미
통상 '만남'이란 병렬적인 두 주체가 만나는 것을 말한다. 말인즉슨 복음교회가 한 축이고 민중신학이 한 축이어서 두 축이 이제 비로소 만난다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 제목은 그런 뜻이 아닐 것이다. 주어진 이 제목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① 민중신학의 입장에서 최태용의 신학, 그리고 복음교회를 평가하는 일, ② 민중신학의 입장에서 복음교회의 미래를 전망하는 일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③ 민중신학의 한 뿌리를 찾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2. 최태용의 생애와 신학
1) 한국 교회사, 신학사에서 최태용의 위치
한국 교회사에서 최태용 목사가 기억되는 것은 1930년대 소종파운동의 한 갈래로서 '조선적 기독교 수립 운동'의 맥락에서 뿐이다. 물론 여러 가지 정황상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한 교단의 창시자로서 기독교장로회의 김재준 목사가 오늘날 평가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된다.
오늘날 김재준 목사가 진보신학 내지는 진보교회의 태두로서 기억되고 있는 반면 최태용 목사는 소종파의 하나인 복음교회를 연 창시자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세간의 평가다. 굳이 두 분을 대비하는 것은 그 현실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인물로서(최태용 1897년생; 김재준 1901년생), 그리고 사실 선배로서 최태용 목사는 당대에서는 결코 김재준 목사에 비해 비중이 작지 않았고, 오히려 김재준 목사가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면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 사람은 세인들에게 뚜렷하게 기억되는 반면 한 사람은 교단 안에 있는 사람들 말고는 잘 기억되지 않는 사연이 어디에 있을까? ① 아마도 결정적 차이는 젊은 시절 두 사람은 동시대인으로 상당 부분 같은 뜻을 나눴지만, 이후의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 남긴 족적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최태용 목사는 6.25를 기점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김재준 목사는 6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그 존재를 세상에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를 누렸다. 그 점에서 두 사람을 동등한 비교대상으로 놓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하필 그 남긴 족적만을 놓고 비교하자면 정치권력과의 상관관계에서 비교되는 면도 두 사람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아마도 일제치하에서의 두 사람의 입장은 종교적 진보주의/자유주의라는 점에서 일치하는 것 같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교회사에서 종교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진보주의/저항태도는 항상 일관되게 짝을 이루는 관계가 아니었다. 일제치하,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종교적 자유주의는 정치권력에 대해 저항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최태용 목사와 김재준 목사는 크게 보아 공통된다. 물론 이 시기 두 사람 사이에서 두드러진 인물은 최태용 목사였다. 그리고 최태용 목사는 이승만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그 주변에서 국민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그 시기 교회에 발목이 잡혀 있던 김재준 목사는 비교적 조용한 존재였으나, 박정희의 등장과 함께 뚜렷한 정치적 저항의 전선에 나선다. 이런 사정 때문에 김재준 목사가 진보교회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게 되었을 것이다. 추정이지만, 최태용 목사 역시 이 시대를 살았다면 같은 변화를 겪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최태용 목사는 그 시대를 누리지 못한 탓에 이전의 족적만으로 기억되고 평가되는 반면 김재준 목사는 새로운 시대에서의 소임을 맡은 인물로 평가되는 것이다.
② 다음으로, 복음교회 동지들에게는 다소 뼈아픈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두 사람에 대한 대비되는 평가는 현재 교회의 위상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기장이 작은 교단이라 하지만, 그렇게 작지 않다. 반면에 복음교회는 정말 작은 교단이다. 사실 큰 교단이든 작은 교단이든 일반적인 교인 수준에서 보면 신앙 양태상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기장 교회는 그래도 결코 작지 않은 교세 가운데서 진보적 그룹이 대세를 이룰 수 있는 조건에 있었다면, 복음교회에는 비율로 보자면 진보적 운동의 비중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소수여서 미미하게 여겨진 것이다. 그 점이 최태용 목사에 대한 평가에도 투영된 것이다.
③ 그 다음 신학교 문제도 있을 것이다. 교단 자체의 재생산구조를 갖추고 있지 못하기에 최태용의 신학 진가를 깊이 탐구하고 계승하는 데 일정 부분 취약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④ 개인 성품의 차이와 신학의 차이도 다소 있는 것 같다. 김재준 목사는 매우 일관되게 이지적 특성을 띤다. 최태용 목사도 기본적으로 이지적이다. 그 스스로 고백했듯이... "기독교에는 다방면이 있다. 나는 그 한 방면을 차지함에 불과하다. 愛에 있어 長한 신자도 있고 聖에 있어 장한 신자도 있다. 그래서 애에 대하여는 제군은 다른 성도에게서 배움이 있기를 바란다. 특히 나의 종교에 있어서 애, 성은 결여하여 있는 것이 사실이니 제군은 이 결여를 타에서 채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기탄없이 말하게 하라. 애와 성은 사람이 오히려 깨닫기 쉽다. 다시 말하면 애의 人, 성의 인은 사람이 보면 곧 저에게서 感을 얻기 오히려 쉽다. 따라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자라든지, 하나님은 사랑이라든지 사람이 배우기 오히려 쉬운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나 진리이신 하나님, 그는 용이히 알기 어렵다. 하나님이 진리를 계시하기 위하여서는 역사를 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태용 목사에게는 이지적인 면이 전부가 아니다. 그는 한마디로 '폭발적 영감'을 가진 사람이었고 동시에 '급박한 책임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그러한 성품은 그의 신학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신비주의적 열정으로 기성의 체제를 강력히 거부하기도 했지만, 교회와 민족, 국가라는 역사적 실체를 중시하는 대안적이며 책임적인 태도를 견지하기도 했다(몽상가인 동시에 현실주의자). 아마도 그의 생애와 신학은 그 양극이 그에게서 어떻게 모순과 조화를 이루는지 해명하는 데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와 같은 성향이 복음교회에도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최태용과 백남용이 주도한 집회는 열광주의적 부흥회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교회운동의 태동에는, 그와 형태상 유사한 집회 운동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60년대에도 다시 재현된다. 60년대의 부흥운동을 어찌 평가해야 할 것인가 과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투신한 복음교회 선각자들의 태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말하자면 70년대 이후 복음교회의 진보적 운동이 열광주의적 운동을 상쇄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점 때문에, 복음교회의 정체성이 분명히 부각되지 못한 면이 있다. 게다가 하필 '순복음'과 '복음'이 혼동되기까지 했다. 최태용 신학에서 건질 것이 있다면,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후배들의 몫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장황하게 이야기한 뜻이 여기 있다.
2) 최태용의 생애와 신학
(1) 기독교로 회심하기까지 최태용은 1897년 함경도 영흥 출생으로 그다지 궁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망국의 설움은 당시 모든 조선인들에게 공통되는 것이었고, 어린 최태용의 의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은 말할 것 없다. 최태용은 1913년 수원농림학교 관비생으로 유학하였는데, 그 때 그의 일생을 결정짓는 두 가지 계기가 생겼다. 하나는 기독교에 입문한 것이며, 또 하나는 농민운동 또는 국민운동 투신의 동기를 부여받은 것이었다. 이러한 두 계기의 결합으로 그의 '민족적 신앙'이 형성되었다.
(2) 소명 ① 18세 되던 1916년 늦가을 수요 예배 후 "복음을 위하여 네 몸을 바치라"는 음성을 듣는 소명체험을 한다. ② 1917년 춘원 이광수가 「금일 조선 야소교의 결함」을 통해 신학적 무식과 미신화된 신앙 질타하던 즈음 최태용은 무교회주의 신앙을 접한다. 여기에서 그는 신앙과 교회, 복음과 교리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인식은 영과 진리에 대한 추구로 이어졌다.
(3) 『天來之聲』 ①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가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는데, 그 즈음 잠시 배화학교 선교사에게 한국어 교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 기회를 통하여 최태용은 선교사의 문제점을 간파하였다.
② 연희전문 신과에 입학하였으나 과정을 마치지 않았고, 연희전문 농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연희전문 시절 최태용은 솔밭에서 기도하며 민족신앙의 기틀을 다졌다.
③ 1921년 본격적인 신학 공부를 위하여 일본에 유학하였다. 이 시절 최태용은 '제2의 우치무라 간조'로 불릴 만큼 우치무라에게서 깊이 사사했고, 그에게서 무교회주의의 영향을 깊게 받은 한편 그의 '일본 기독교'를 통해 애국심을 배웠다. 한편 다카쿠라에게 복음적 기독교, 내면적 신앙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최태용 신학에서 '민족'과 '복음'은, 전적으로 그들에게서 배운 것은 아니지만 그 영향과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④ 1923년 귀국 『신생명』에 투고하며 개혁적 신앙 역설하기 시작했는데, 「제도냐 신앙이냐」라는 글을 통해 "제도가 복잡한 교회일수록 신앙이 타락"한다고 강조하였다.
⑤ 1925년 "교회혁명운동"이 아니라 "신앙혁명운동" 제창하며 『천래지성』을 창간하였다. 1920년대는 새로운 부흥운동으로 교회의 비정치화 현상이 가속화되는 시점이었다. 독립운동세력이 교회로부터의 이탈하였고 사회운동은 급진화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최태용은 절박한 민족구원과는 상관없는 신앙, 그리고 선교사들에 매인 교회 현실을 비판하였다. 최태용은 민족운동 일선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신앙을 갱신함으로써 민족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 즈음 최태용은 '무교회주의'에서 '비교회주의'로 선회하였는데, 그것은 현실 교회를 비판하는 차원에서 대안적인 교회를 구상하는 차원으로의 인식 전환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것은 그의 교회 비판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의 교회를 뒤집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는 뜻을 품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최태용은 실제로 교회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아야 했고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로부터의 비난이 거세어지자 그는 '보이는 사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에 대한 인식을 깊이 하게 되었고, 또한 진리는 다수에 있지 않고 소수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훗날 복음교회의 중요한 좌표 가운데 하나인 "小하고 純하라" 깊게 각인한다. 그는 교회를 보고 "죽은 껍질을 벗고 생명에 나서라."고 외치며 생명 신앙과 민족 구원을 역설하였지만, 교회는 여전히 냉랭하기만 했다. 그 냉랭한 교회현실에 지친 최태용은 1927년 『천래지성』을 폐간한다. 이 시기는 최태용의 신앙 형성에 중요한 시기로, 다양한 요소들이 융합되는 일종의 실험기였던 것 같다.
(4) 『영과 진리』 ① 한동안의 침묵 끝에 1928년 다시 일본에 유학하여 명치학원 신학부(일본신학교) 입학하였고, 『천래지성』 대신에 『영과 진리』를 창간하였다(1929-1931).
② 『영과 진리』에 요한복음에 근거한 「영적 기독교」론을 연재해나갔다. 여기에서 그는 "영은 하나님의 본질을 말함이요 진리란 그 본질의 언표됨"이라고 전제하고 "영과 진리에 입각한 생명 신앙은 죽은 교리에의 맹목적 순응을 단호히 거절하고 거짓된 경건의 껍데기를 벗어버린다."고 역설하였다.
③ 현실 교회와의 관계에서 그에게 가장 큰 과제는 고정주의(근본주의) 및 신비주의(열광주의)와 대결이었다. 그는 여러 집회를 통해 그와 같은 교회의 병폐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결국 그는 교권으로부터 단죄를 받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마저 단죄 받았다.
④ 1932년에 귀국한 최태용은 '조선신학'에의 꿈을 펼치려고 하였다. 그것은 '신앙혁명'에 이은 '신학혁명'을 의도한 것이었다. 근본주의와 반지성주의로부터 탈출을 위하여 새로운 신학의 산실로 조선신학숙을 열었지만 참담한 좌절을 겪고 만다.
그러나 『영과 진리』의 시절 최태용의 신학은 무르익어 '영적 기독교'와 더불어 새로운 ' 조선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는 시기였다. 『천래지성』 특히 『영과 진리』의 시대는 최태용에게 있어 '폭발적 영감'의 시대였다고 할 것이다.
(5) 민족교회 - 조선복음교회 앞의 시대가 폭발적 영감의 시대였다면 이제부터 책임적 대안을 모색하는 시대에 해당한다.
① "영은 순연한 영대로 있어서는 인간계에 교섭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영이 인간계에 교섭을 가지기 위해서는 역시 약간의 형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태용은, 기독교가 제도화되어 그 본래적인 의미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지만 "그것이 역사에 처하기 위하여 취하는 형식"으로 교회를 인정하였다. 무교회주의의 본래적 사명은 기독교의 진리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데 있는 것이지 구체적인 교회를 부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이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즉 우리는 차라리 무교회주의적 기독교를 가지고 교회에 들어가 교회를 교회 이상의 진리로서 살려야 할 것이다."
② 1935년 12월 22일 "조선복음교회"를 창립하고 금마교회 윤치병목사로부터 안수받은 후 감독에 취임하였다. 이 때 조선복음교회는 세 가지 표어를 내건다.
1.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라 2.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라 3.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이어라
③ 1930년대말, 40년대는 교회에게는 매우 미묘한 상황이었다. 대동아전쟁으로 선교사와 일제 당국이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전 시기에는 반선교사가 곧 반일과 상통하였으나, 이제는 반선교사가 친일로 귀결될 수도 있는 묘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내선일체를 표방하는 가운데 조선 기독교의 일본화를 시도하였다. 최태용은 기독교의 일본화를 거부하고 조선 기독교를 세웠고, 한편으로 조선자치정부운동을 지지하였다. 또한 강제징용 모면책으로 글라이더공장 설립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창씨개명한 사실과 1932년 『동양지광』 기고문 「조선기독교회의 재출발」은 친일협력의 의혹을 사는 빌미가 되고 있다. 두말할 것 없이 없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아마도 최태용의 그와 같은 족적은 일제말 개량주의적 민족주의 노선을 따른 사람들, 그리고 종교적 자유주의(또는 진보주의)를 견지한 사람들 대다수와 공통된 행보로 봐야 할 것이다.
(6) 국민계몽운동 해방이 되자 최태용은 교회보다는 사회(민족과 국가)를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농민회 부회장과 국민훈련원장을 맡았는가 하면, 서울대학교 총장 후보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최태용은 직접 현실정치에 참여하기보다는 일관되게 일종의 시민운동 차원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신국가론'을 역설하며 시민운동 차원에서 민족 국가운동을 전개하였다(이 점에 대해서는 후술).
3. 다시 음미하는 조선복음교회 3대 표어
1)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라
신앙혁명운동을 집약한 표어다. 복음의 요체로서 '영과 진리'(요한 4장)를 추구하는 신앙의 표어로서, 그 신앙에 입각할 때 신앙은 생명적이라는 뜻을 함축한다. ① '신령과 진정'이라는 표현과 함께 열광주의적 부흥회를 연상하나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 ② 장소 구속성, 곧 사물을 절대화하는, 다시 말해 제도와 형식을 절대화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정신이다. 영을 강조하는 역사상의 모든 운동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의 언표로서 진리와 결합함으로써 그것은 감성적 열광주의와는 구별된다. 진리는 곧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의 영', '살리는 진리'라 말할 수도 있다.
2)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라
① 한국교회의 신학의 결핍 또는 반지성주의를 반성하는 표어다. 선교사들의 고정주의(근본주의), 신비주의(열광주의)는 그 신학의 결핍의 원인이요 결과다. ② 결국 그 신학의 결핍 또는 반지성주의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③ 여기에는 조선의 신학을 수립하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최태용에게 조선의 신학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빈약했다. 그가 말한 '조선의 신학'은 근대적 학문에 기초한 신학이라는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 기초 위에 한국적 신학을 수립하자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은 충분히 확장될 수 있다. 흔히 토착화는 두 가지 차원을 함축한다. 하나는 문화적 토착화요 하나는 정치적 토착화이다. 복음교회에는 이미 제례를 인정하고 전통악기를 사용하고 전통 시조를 읊는 등 문화적 토착화의 맹아들이 있었고, 민족구원을 복음의 구체화로 이해하였던 전통은 정치적 토착화의 차원과 관련된다. ④ 그 두 가지를 철저화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다.
3)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이어라
① 일차적으로 선교사로부터의 신학적 경제적(재정적) 독립을 표방한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 정치적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② 이것은 나아가 주체적 신앙의 형식을 의미한다. '한국인 자신의 교회'라는 표현은 두 가지 차원의 주체의 형식을 말한다. 이 점에 평가로서 결론을 맺자.
4. '한국인 자신의 교회'의 오늘과 내일
1) 복음교회의 세 표어는 생명적 신앙을 기본 원리로 하여 그 원리의 두 가지 외화 형태로 표현된다. 하나는 충분히 학문적인 한국적 신학이며, 하나는 한국인 자신의 교회이다. 그런데 신학과 교회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관계로 설명할 수 있으므로, 생명 신앙을 축으로 하여 말하자면 그 어떤 것을 설명해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 신앙의 외화 형태로서 신학과 교회에 관한 표어 가운데 교회에 관한 표어가 훨씬 구체적인 문제 범주를 지니고 있기에 그것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한국인 자신의 교회'는 집약해서 말하면, "역사적으로 구체적이며 주체적인 신앙 형식"을 말한다. 하나는 한국인이라는 민족 범주이며, 하나는 교회라는 범주다.
그러나 오늘날 이 두 가지 범주는 모두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쉽게 말해 민족을 외치면 국수주의자가 되기 쉽고 교회를 말하면 보수주의자가 되기 쉽다. 보편적 가치보다 민족을 우선하고, 기독교인의 다양한 존재방식보다는 교회를 고집할 경우가 그렇다.
그렇다면 '한국인 자신의 교회'란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이 문제에 어떻게 답할 수 있느냐에 복음교회의 미래 전망이 달려 있다. 과연 의심의 여지없이 자랑스러운 표어로 내세울 수 있는가? 왜 한국인이어야 하며 왜 교회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궁해지면 곤란하다.
2) 왜 한국인/조선이어야 하는가? 과거 역사에 비춰볼 때 그 정당성은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나라는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교회는 선교사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당연히 민족을 강조하는 것은 그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오늘날에도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정당성을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강대국(미국)의 패권 시대를 살고 있고, 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불평등한 위계질서 가운데 위치해 있다. 더욱이 한국은 그와 같은 일반적 상황 외에도 과거의 유산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채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아직도 근대적 민족국가의 수립은 미완이라는 인식도 있다. 이 점에서 피해('가해'가 아니라) 민족으로서 민족주의의 정당성을 외칠 수 있는 근거는 아직도 분명하다. 나는 그 점을 쉽게 간과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저항적 민족주의의 정당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과연 민족을 보편타당한 어떤 가치를 말하는 틀로 계속 주장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3) 왜 교회이어야 하는가? 이 점에서도 물론 다른 교회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 정당성의 근거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에 '대안교회'라는 말도 우리들 사이에서 사용하고 있는 현실에서 보면 '교회'라는 말 자체가 기성교회 또는 제도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새로운 교회, 대안교회라는 의미로 보면 거리낌없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 현실 교회를 지칭하는 의미에서 '교회'라는 말은 어떤 면에서 '민족'보다 훨씬 절망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내가 앞에서 변명으로 말한 사연은 그 중요한 한 이유다. 가장 진보적이라는 기장 교단, 전여옥 식으로 말한다면 "기장은 없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 점에서 복음교회는 어떨까? 그러나 '민족'과는 정반대로 '교회'는, 오히려 보편적 가치를 말하는 틀로 훨씬 유용할 수도 있다. 그 자체가 이미 새로운 존재방식을 표상하는 것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사실 본래적 의미에서 교회는 그 자체가 보편적 성격을 띠고 있다. 바로 그 점에서라면 '대안교회'라는 말을 사용하듯이 계속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그것은 분명히 현실교회와의 명백한 긴장관계를 전제로 해야만 한다.
4) 이런 문제의식하에서 여전히 '한국인 자신의 교회'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나는 처음부터 이를 긍정적으로 규정했다. "역사적으로 구체적이며 주체적인 신앙 형식"이라고. 그것은 특별히 최태용 신학을 전제로 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최태용 신학 안에서 팽팽한 긴장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최태용의 신학, 그리고 그 집약적 표현으로서 복음교회의 첫 번째 표어와 둘의 과제는 어울릴 수도 있고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세 번째 과제와는. 왜냐 하면 영과 진리에 입각한 생명적 신앙은 사실 모든 기성의 것들을 해체하라는 선언에 해당한다. 모든 기성의 것들이 자유를 주기보다는 속박을, 생명을 주기보다는 죽음을 준다는 것이 최태용의 인식이었으며 복음교회의 출발동기였다.
그런데 복음교회는 기성의 형식을 원천 배제하지 않고 그것을 다시 수용하였다. 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것은 최태용 목사 자신도 인식했지만, 내 식으로 표현한다면 '시대적 형식'일 뿐이다. 그것은 신앙의 역사개입의 방식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나만 순결하면 된다는 도사 말고,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과제를 생각하는 운동가라면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결론이다. 그 점에서 최태용은 꿈 많은 몽상가였으면서도 동시에 철저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꿈을 담을 그릇을 찾는, 말하자면 대안적 운동가였다.
5) 그와 같은 면모는 신국가 건설을 외치며 국민운동을 전개한 데서도 드러난다. 민족을 외쳤듯이 최태용이 국가를 외치는 것을 보면 파시스트가 아닐까 하는 의혹을 떨치기 어렵다. 게다가 반공주의자였으니 더더욱 그런 혐의를 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최태용의 신국가론을 보면 그가 안일한 국가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이승만에게 기대를 하였던 것은 순진함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최태용이 그렸던 것은 이승만 정권의 그것은 아니었다. 정치와 행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일종의 시민운동 차원에서 국민운동을 벌인 데서도 그 면모가 드러나지만, 최태용이 '국가'를 생각했을 때 그것은 '공공성'을 의미했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개인의 고립을 뛰어넘는 관계, 그것은 그가 직접 표현한 대로 '공공성'이었으며 '공공적 인격'이었다. 결국 그의 신국가론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국가권력 또는 당대의 국가권력을 정당화하는 입장이 아니라, 마치 조선복음교회를 새로운 대안으로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존의 국가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었다.
공공성을 실현하는 하나의 기제로서 국가를 인정했던 것이다. 이것은 국가가 일체의 정당성을 지니지 못했던 시대를 경험했다가 새로운 기회를 만난 사람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인식일 수 있었다. 즉 일제 시대에 '국가'는 타민족의 국가일 뿐 내가 인정한 국가가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는 국가가 아니라 민족을 내세워 자신의 정체성의 틀을 찾았다. 적어도 조선인들에게는 민족이 국가를 대신하였다. 그러나 이제 적대 국가가 아니라 내 국가를 내세울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물론 국가에 대한 순진한 환상이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최태용이 유념했던 것은 일종의 국가주의가 아니라 공공성을 실현할 기제로서 국가였다.
6) 우리는 70ㆍ80년대 기독교 진보인사들이 사실은 그 이전에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어떤 학자는 진짜 보수주의가 진보주의가 되고 극우/수구가 보수주의가 된 한국 정치현실을 말하기도 했다.) 아마도 최태용 목사가 더 살았더라면 그와 같은 행보를 걷지 않았을까? 억측이 아닐 것이다. 그의 신앙적 신학적 개방성은 충분히 그런 가능성을 예측하게 한다.
7) '한국인 자신의 복음교회'를 내세울 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내세울 수 있을까? 앞에서 말했듯이 오늘날 '민족'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진보적 표상은 아니다. 그것은 진보적일 수도 보수적일 수도 있다. '한총련'이 과연 진보적인 학생운동일 수 있는가? '범민련'이 과연 진보적인 운동일 수 있는가? 아니 정반대로 박정희도 민족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모두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과연 그럴까? 이런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적어도 '민족'('한국인 자신')이 여전히 진보적인 표상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① 우선은, 최태용이 생각했고 일제하 민족운동가들이 생각했던 '민족'의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저항적 민족주의 말이다. 민중신학의 표현을 빌자면 '민중적 민족'이다. ② 두 번 째로,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지만, 공공성 혹은 보편성을 담지하는 민족주의 인식이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보편적 권리 확장의 연장선상에서 제창되었던 민족의식, 민족주의와 같은 것이다. 앞의 것과 직결시켜 말하면, 단순하게 말해, '민족'이 보편적이냐 '민중'이 보편적이냐 하는 물음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민족 안에 민중이 있느냐, 민족의 경계를 넘어 민중이 있느냐는 말로 바꿔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갇힌 민족주의는 민족 안에 민중이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열린 민족주의는 민중적 현실에 처한 민족을 생각한다. 나라와 민족이 항구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항구적인 것은 인간이다. 그리고 그 역사적 존재형태로서 민중이 보다 보편적이다. 민족도 민중도 모두 인간의 역사적 존재방식이지만, 민중이 민족에 우선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 자신'이라는 말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로 사용될 때만이 복음교회는 진보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 '교회'라는 말이 함축하는 의미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했기에 그것으로 대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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