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놀아줘 놀아줘
4. 놀아줘 놀아줘
뭉치까지 밤마실을 다니는 통에 안경이 부부는 호젓해졌다. 막내자식까지 다 낳고 보니 둘 사이에 꼭 해야 할 일들이 통과의례가 되어 슬며시 지나가곤 했다. 아이들 낳고 교육시켜 가면서 노후계획까지 세워야 하니 세월이 가는 수만큼 뼈에도 구멍이 생겼다. 비가 오면 관절이 슬슬 아픈 것이 뼈에 구멍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이러다 저승에 가는 날을 받아 놓은 것은 아닌지 싶어 안경이는 마음 한 편이 서늘해진다.
“여보 오늘은 한 잔 하고 싶어. 마치 무얼 잃어 버린 것 같이 허전 해”
“이제 당신도 늙었나 보우. 그래요. 한 잔 하시우”
술잔을 받은 남편의 얼굴에 세월의 잔재가 잔뜩 묻어 난다.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아온지 어느덧 스무 두해가 흘러갔다.
“지금까지 내 곁에 있어 준 것이 고마워.”
빨간 색깔의 와인 잔 너머로 남편이 말해 왔다. 붉으레한 얼굴로 정감있게 다가와 보인다. 와인 잔 너머로 함께 해 왔던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서로 마음을 쓰며 팽팽하게 대립했던 몇 가지 사건들이 머리를 스쳐가며 미안한 마음이 든다. 미안한 마음에 안주를 건네다 남편의 말에 울컥해진다.
“나도 그 말이 하고 싶었어요. 참 당신 고맙고 멋진 남자예요”
찰랑하는 소리가 나도록 와인 잔을 부딪쳤다. 고운자태는 허물어지고 윤기 자르르했던 얼굴은 푸석푸석해져 화장발도 안 먹히는 얼굴이 되었으나 아직도 아름답고 어여쁘다. 내 마눌. 곱게 넘긴 귀밑머리가 아찔하도록 어여뻤던 그녀였다. 학창시절 미인으로 소문이 났던 찬란한 이력을 가진 그녀였다. 대단한 외모와 뛰어난 글솜씨, 다만 혀가 좀 짧은 것이 흠이었으나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기 전에는 알 길이 없었다.
안경이는 등교하는 그녀의 뒷 모습이 보고파 먼 발치에서 기다렸다가 그녀가 지나가면 슬며시 뒤를 따라 걷곤 했다. 어느 순간에 가니 그녀가 뒤돌아 보아 주기를 고대하는 마음이 생겼다. 내일은, 내일은 하며 잠이 들곤 했다. 고민 고민 하다가 편지로 자신의 마음을 알리기로 했다. 밤을 세우며 공들여 편지를 썼다. 밤 새 쓴 편지를 그녀의 책가방에 집어 넣고 토끼면 되는 일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몇 번을 시도했으나 결정적일 때에 딸꾹질이 나서 애만 먹었다. 하교 후 집에 돌아 와서는 자신의 머리통을 쥐어 박고 주범인 목울대를 쥐어 뜯었다. 드디어 하늘 빛이 고운 어느 날 아침 등교시간에 밤 사이 공들여 쓴 편지를 고이 접어 그녀의 책가방에 슬며시 끼워 넣고는 꽁지가 축축해지도록 내뺐다. 다음 날은 용기가 없어 그녀의 뒤를 따르지 못했다. 그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그녀의 뒤를 따르지 못하고 자신의 머리와 가슴만 줴질러댔다. 며칠이 지나자 어이없게도 감기가 찾아왔다. 조퇴를 하고는 집에 누워 꿍꿍 앓았다. 아침에도 열이 떨어지지 않아 등교도 못 했다. 엎치락 뒤치락 하며 앓고 있는데 아는 동생이 찾아와 슬며시 편지를 전해준다.
“누가 준거냐?”
“몰라요. 보면 알거라고 하던데요” 하고는 도망치듯 가버렸다. 이마에 얼음주머니를 올려 놓고 있는 판국에 어찌해 볼 도리도 없고 편지내용도 궁금해서 고이 접힌 편지를 펼쳤다. 향수냄새가 은은하게 퍼지는 편지지였다. 그녀의 편지였다.
“답장을 드리려 했는데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실없는 사람은 아닐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네요. 아파서 학교에도 못 갔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오해가 풀려 편지를 보냅니다. 빨리 나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호수 드림”
안경이는 마치 그녀 앞에서 책망을 받는 듯 깜짝 놀라 튀는 듯 일어나 앉아 다시 읽어 보았다. 짧은 글 속에 함축된 의미가 깊었다. 휴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편지 내용에서 그녀의 깐깐한 성격이 보이는 듯하다. 언제 어디에서 만나자는 소리도 없고 혹시나 무슨 암호 같은 내용이 숨겨 있지는 않을까 하여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어쩌라는거냐. 답도 없고 신호도 없다. 만나지면 운명이요, 못 만나면 땡이냐. 하도 오래 누워 있다 보니 엉덩이에서 밤 삶은 냄새가 난다. 세수를 했다. 양치질을 하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안 되겠다. 동생 녀석을 만나 봐야겠다. 거울을 보니 헬쓱하다. 안방에 들어가 어머니가 아끼는 콜드크림을 푸욱 찍어서 얼굴에 바르고 손에 남아 있는 것으로 머리에도 발랐다.
“모른다니까요. 그 누나가 어디 사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천 원짜리 한 장 주면서 심부름해 달라고 해서 심부름한거야요”
“얌마 그래도 어디쯤 사는지 정도는 알거 아니냐. 너는 마당발에 정보통 아니냐. 너를 당할 자가 어디에 있냐”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모르는 걸 어떡해요. 그 누나가 절대 가르쳐 주지 말라고 했... 히잌 내가 왜 이러냐. 꼴깍”
“앞장 서 임마”
그녀의 집 대문 앞에서 한 블럭 떨어진 전봇대 뒤에 서 있으라 하고 녀석은 그녀의 집 창문 앞에서 누나 누나 하고 불러댔다. 창문이 열리며 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몇 마디 소근소근 하더니 녀석이 돌아 왔다.
“저 앞 놀이터에서 기다리래요.”
“고맙다. 니가 울 아버지다.”
주머니에서 꿍쳐 두었던 이천 원을 꺼내 녀석에게 쥐어 주었다. 녀석은 쌩큐 하고는 실실 거리며 오락실로 달려갔다. 놀이터에 도착하여 두리번 거리다가 그네를 타고 있는 꼬맹이의 뒤를 밀어 주면서 그녀가 올 때까지 기다리며 사전 정지작업에 들어갔다. 꼬맹이의 등을 좀 세게 밀면서 꼬맹이가 그네에 정이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결국 꼬맹이는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 바람에 옆에서 그네를 타고 있던 꼬맹이도 재미가 없는지 집에서 놀자 하고는 먼저 물러난 꼬맹이의 뒤를 따라갔다. 안경이는 두 그네의 줄을 한 손으로 잡고 이리 흔들 저리 흔들 하면서 그녀를 기다렸다. 잠시 뒤 놀이터 입구 쪽에 그녀가 보였다. 옅은 쑥색의 원피스를 입고 하얀 운동화를 신었다. 머리에는 눈에 뜨이는 머리핀으로 포인트를 주어 멋을 부렸다. 목례를 하고 나서 그네에 둘이 앉았다.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고 펌프질을 해댄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마른 침만 꿀꺽꿀꺽하고 몇 번을 삼킨 끝에 겨우 말했다.
“답장까지 주시고 이렇게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픈 데는 다 나았나요. 거정했어요.”
둘은 이렇게 만났다. 얼마가 지난 후에야 앞에 단어에 받침이 있으면 뒤에 있는 받침이 무시된다거나, 단어 앞에 받침이 없으면 뒷단어의 받침이 강조되는 혀가 좀 짧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키쓰하는 데는 결코 아무런 지장도, 어떤 장애도 없었다. 첫 키쓰는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안경이가 냅다 귀를 잡아 당기며 입술을 포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날 생각나우?”
“우리 처음으로 잠자리를 한 날?”
배시시 몸을 꼬면서 아내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며 안경이를 쳐다 본다.
“아니 우리 처음으로 입맞춤 한 날”
“어머 어머 그날?”
그 때가 생각나는 듯 아내의 몸이 허물어지며 추욱 늘어진다.
“아무래도 나 당신 옆으로 가야 할까 봐. 머리가 어지러워”
호수가 정말로 어지럽다는 듯 이마에 손을 대며 짐짓 교태를 부리며 다가 와서는 포개 앉는다. 자신의 무릎 위에 달랑 올라 앉은 호수의 빨갛게 달아 오른 얼굴을 보느라 안경이는 그녀의 체중이 얼마인지를 잠시 잊었다. 하긴 오동통해져서 그렇지 미륵돼지처럼 살이 너덜거릴 정도는 아니다. 어쩔 수 없는 나잇살에 배가 안 접혀지는 것이 흠이지 넉넉한 살집이 오히려 정겹다.
“그 때처럼 해 줘용”
안경이가 호수의 귀를 잡고 입술을 포갰다. 혀가 짧은 그녀의 동작이 안경이의 입 안에서는 민첩하게 움직인다. 아내의 빨아 들이는 몸짓이 안경이의 가슴 속에 불을 지폈다.
“놀아 줘 놀아 줘”
달뜬 목소리가 아내의 쫑긋한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며 아내의 손이 안경이의 목에 감겼다.
첫 키쓰, 첫 잠자리. 수 십 년을 연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고리였다. 그것은 해가 떠오르는 시각에는 활력이 되어 하루의 삶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견인차가 되었다. 해가 지는 만종의 시간에는 보람과 행복을 안겨 주었다. 힘이 들고 괴로운 일이 생겨도 언제나 그 때를 생각하면 황홀해졌고 장애를 뛰어 넘을 수 있는 돌파력으로 작용했다. 때때로 커브를 그리며 기복이 만들어지는 어쩔 수 없는 삶의 환경도 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면 줄여서 쓰면 되었고 남는 것이 있으면 재투자는 못 해도 혹시 생길지도 모를 어려운 때를 위해 대비하면 넉넉한 마음까지 생기곤 했다. 언제나 현재적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생활 화되어 익숙해져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며 정직하고 성실한 삶의 태도가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일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만 고단한 삶을 유연하게 넘어 설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할 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성실과 정직을 바탕한 정공법으로 돌파하면 그만 이었다.
때때로 틀에서 벗어난 생각을 할 때도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결과는 하나였다. 최선을 다한 삶은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돌아섰다. 생각은 행동을 유발하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운명을 결정짓는다. 가슴 속에 박혀 있는 이 말이 좌우명이 되어 저 멀리 달음질하려는 발에 족쇄를 채워 붙들어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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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80회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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