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라
   
 
작성자 안형식목사
작성일 2005-09-10 (토)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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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문학의 분류 (백과사전)
[고대그리스문학]

호머(BC 8세기)로 시작되어 전(前)고전기(BC 8∼BC 6)·고전기(BC 5∼BC 4)·헬레니즘시대(BC 3∼AD 1)를 거쳐서 로마제정 후기인 5세기까지의 문학. 그리스인은 BC 10세기 경부터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각지에다 식민지를 두었는데 특히 역사시대로 들어가는 BC 8세기 이후 식민활동이 매우 활발해져 동쪽은 소아시아의 연안 일대, 서쪽은 이탈리아반도와 시칠리아·남프랑스로부터 에스파냐에 미쳤고, 북쪽은 흑해 연안, 남쪽은 아프리카북쪽 해안에 이르는 지역에 그리스 도시를 세웠다. 그 결과, 그리스 각지에는 양식(樣式)·언어(방언)·운율이 다른 독자적인 문학들이 생겨나, 그리스문학은 다른 문학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성을 나타내게 되었다. 단, 고전기에는 아테나이(아테네), 헬레니즘시대에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라는 식으로 각각 도시가 문예의 중심지로 되었기 때문에, 지방색을 반영한 문학은 모습이 희미해져 갔다.

서사시·서정시·연극·산문 등의 문학형식은 대부분 고대그리스문학에서 출발하였다. 소설만은 근대문학이 창조한 것이라고 하나 로마제정시에 유행한 연애이야기, 이른바 <그리스소설>은 근대소설과는 취향을 달리한다고는 하나 전혀 유사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고전문학에서는 문학의 개념을 근대보다도 넓게 해석했으며, 철학·역사·변론, 나아가서는 자연과학 분야에도 미치는 수가 적지 않았다. 헤로도투스·히포크라테스·플라톤·데모스테네스들이 문학사에 등장하는 것은, 그들의 작품이 산문학(散文學)의 대표로 지목되기 때문이다.

[서사시]

그리스문학이 호메로스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일리아드(Iliad)》 《오디세이(Odyssey)》의 2대 서사시에서 시작된다는 정설은 치졸한 요람기에서 성숙기에로의 과정을 생략하고 갑자기 완성도(完成度) 높은 작품을 내걸고 있기 때문에 간혹 의심되기도 한다. 그리스서사시는 호메로스 이전 수백 년이나 소급하는 긴 전통을 지니고 있으나, 호메로스의 천재적 재능에 의해 이상적 완성도에 달한 대작품의 출현으로 인하여, 전대(前代)·동시대 및 후대의 군소작품은 퇴색하고 잊혀지게 되었다. 호메로스류의 영웅서사시는 이오니아에서 성립했으며, 그리스 본토에서는 보이오티아를 중심으로 하여 다소 그 성격을 달리하여 서사시의 일파가 번영했다. 이는 이오니아파에 대하여 본토파, 또는 보이오티아파라고 불리며, 그 대표적 시인이 헤시오도스(BC 8세기 말)였다.

이오니아파는 화려하고 오락적 성격이 강하나, 본토의서사시는 오히려 실용적·윤리적 색채가 짙다. 헤시오도스 작 《일과 나날》은 방종스런 아우를 훈계하며 농사를 가르칠 목적으로 그려진 일종의 농사력(農事曆)이다. 《신통기(神統記)》는 신들의 계보를 말하면서 인륜의 길을 제시한 작품이다. 그는 호메로스와 나란히 후세에까지 그리스인의 종교관·윤리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BC 7세기 이후에는 서사시가 다소 쇠퇴하지만 헬레니즘시대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칼리마코스·아폴로니오스 등에 의해 서사시의 재흥이 있게 된다. 칼리마코스는 소(小)서사시에 몰두하였고 아폴로니오스는 《아르고선(船) 이야기, 4권》의 장대한 작품을 저술하였다. 이들은 로마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로마제정기인 4∼5세기에 퀸투스 스미르나이우스는 《호메로스 후일담(後日談, 14권)》을, 무사이오스는 《헤로와 레안드로스》를, 이집트 태생의 논노스는 《디오니소스 이야기, 48권》를 저술하였다. 이것들은 후대에까지 널리 애독되었으며, 근세의 문학에도 영향을 끼쳤다.

[서정시]

고대그리스에는 오늘의 서정시에 걸맞는 용어는 없었고, 이암보스·엘레게이아·독창시(獨唱詩)·합창가 등으로 시의 형태나 양식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불렸다. 따라서 여기서 서정시라고 하는 것은, 시인이 운율에 의해 자기의 감회를 술회한 작품이라고 할 정도의 의미로서, 대부분의 경우 피리나 퉁소 또는 하프의 반주를 수반함을 이른다. 엘레게이아와 이암보스는 이오니아에서 생겨난 것으로 엘레게이아는 서사시를 약간 변형시킨 2행 1연(聯)의 형식이고 이암보스는 단장(短長)의 운각(韻脚)을 6각(脚) 포함하는 1행 단위의 시형이다. 이 2가지 형태는 비슷하게 발달했으며 아르킬로코스·솔론과 같이 양(兩)시형을 활용한 시인도 적지 않다.

엘레게이아는 그 시형에서 추측되듯이 장중·엄숙한 내용의 것이 많고, 군가(軍歌)·연애가·애도가(哀悼歌), 나아가 정치사상·인생관을 서술한 것 등 그 주제가 다양하였다. 대표적 작가는 아르킬로코스·칼리노스·티르타이오스(Tyrtaios)·밈네르모스·솔론, 교훈시의 작가로서 유명한 테오그니스가 있다.

한편, BC 6세기의 철학자 크세노파네스도 엘레게이아라든지 이암보스의 시형으로 뛰어난 작품을 썼다. 이암보스의 운율은 평상시의 일상언어에 가깝다고 말할 정도로 그 내용도 엘레게이아에 비하면 훨씬 스스럼 없는 것으로서, 개인 공격 또는 울적한 세상에 대한 불만을 풍자 및 매도로써 발산하였다. 아르킬로고스는 그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좁고 더러운 거리에서 막된 일생을 보낸 히포나쿠스와, 인생의 비애(悲哀)를 노래한 세모니데스는 그의 후계자였다.

오늘날의 서정시에 가장 접근한 것은 아이올리스(Aiolis)와 이오니아에서 일어난 이른바 독창시이다. 대부분은 4행을 단위로 하여 하프를 연주하며 읊었던 스탄자[聯(연)]형식의 것으로 아이올리스에서는 레스보스섬의 알카이오스와 사포, 이오니아에서는 아나크레온이 그 대표적 시인이다. 이들은 모두 모국(母國)의 사투리를 썼고, 일상생활에서의 갖가지 감회를 정직하게 노래했다.

알카이오스와 사포는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서, 알카이오스는 정쟁(政爭)으로 세월을 허송하는 현실을 격앙된 어조로 읊었고, 사포는 동성연애자들의 사모의 정을 노래하였다. 또한 아나크레온은 독재자들의 요구에 의한 향락적인 작품을 많이 썼다. 고전기 이후에는 그다지 뛰어난 시인은 없었다. 서정성이 매우 높은 시형인 <목가(牧歌;파스토랄)>를 창시한 테오크리토스와 그의 후계자인 모스코스, 그리고 비온과 《그리스사화집(詞華集)》에 연명으로 기록된 메레아그로스, 아스클레피아데스들도 헬레니즘시대의 흘륭한 시인이다.

합창가는 오늘날의 서정시의 개념과는 가장 거리가 먼 장르이다. 원래는 제례나 축전의 가무대(歌舞隊)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공적(公的)인 성격이 짙었다. 시칠리아 출신인 스테시코로스(BC 7∼BC 6세기)가 창시했다는 3부형식(正歌·反歌·添歌)이 합창가의 최종적 패턴이고 이는 비극의 합창가에도 도입되었다. BC 6∼BC 5세기에는 시모니데스·핀다로스·바킬리데스의 3대가가 나타남으로써, 합창가는 최성기를 맞았다. 그들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왕후(王侯) 귀족의 의뢰로 제작한, 올림피아 등의 경기 우승자를 격찬하는 축승가(祝勝歌)였고, 핀다로스 작의 《축승가》 4권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핀다로스의 작품은 도리스 특유의 장중·엄숙한 격조였고, 매우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외에도 디오니소스 숭배와 관련이 있는 디튜람보스라는 합창가 형식도 한때 유행했고, 핀다로스, 바킬리데스에도 이런 종류의 작품이 있다. BC 5∼BC 4세기에 걸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디튜람보스 작가는 티모테오스였다. 한편 시모니데스는 묘비명시(墓碑銘詩)의 작가로서도 유명하며 많은 명시가 전해진다.

[산문]

산문의 발달은 상당히 뒤늦어져, 겨우 BC 6세기경에서야 산문작품이 나타났다. 산문이 운문과 구별되어 시가와는 판이한 분야로서 상용(常用)되기 이전에는 서사시나 엘레게이아, 경우에 따라서는 이암보스의 시형이 역할을 대신하였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초기 철학자들, 즉 엠페도클레스·파르메니데스·크세노파네스 등이 그 철리(哲理)를 설명할 때, 혹은 솔론이 자기의 정치적 신념을 토로할 경우에 운문을 사용했던 것은 산문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산문도 서사시와 마찬가지로 이오니아에서 먼저 일어났다.

초기에는 이오니아 사투리를 사용하였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여러 방면에 걸쳤다.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9권, 고대 의학의 조상 히포크라테스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방대한 의학 논집은 그 대표적 작품이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도 이오니아 산문으로 그 철학사상을 서술하였다. 이오니아 산문의 어휘·조사(措辭)에는 서사시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고, 문체는 대개 단순·소박하다. 이오니아 산문의 전통을 이으면서, 더한층 연마해서 정교한 예술적 산문을 완성한 것은 아테네의 문장가들이다. 민주정치하의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정계나 법조계에서 웅변술을 배워두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이었다. 궤변론자들의 활동과 함께 웅변술과 수사학이 크게 발달했고, 그 영향 아래에서 아티카 특유의 산문이 생겨났다.

역사에서는 투키디데스·크세노폰, 변론에서는 안티폰·시리아스·이소크라테스·데모스테네스들이 BC 5세기부터 BC 4세기에 걸쳐서 배출되었다. 철학에서는 소크라테스 문하의 플라톤이 뛰어났으며, 그의 저서 《대화편》은 산문에 의한 극적 대화로서 훌륭한 문학작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저작은 남기지 않았으나, 설득술이라 할 수 있는 변론법을 서술해 놓은 《레트리카》와, 비극을 중심으로 한 문학 작법(作法)을 논한 《창작론(시학)》은 근세 이후의 문학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헬레니즘시대 이후, 그리스어는 공통어라고 불리면서 세계의 통용어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지식인 사이에서는 순수한 아티카산문 부활의 기운(機運)이 파생되었으며, 변론을 중심으로 의고문(擬古文)에 의한 저작이 성행하였다. 유명한 작가로는 기원전에는 역사가 폴리비오스와 디오도로스, 지리학자 스트라본이 있고, 기원후로는 《대비열전(對比列傳)》 《윤리론집》의 저자 플루타르코스, 풍자작가 루키아노스를 들 수 있다. 파우사니아스·아일리아노스·아테나이오스들의 저술도 전고(典故)를 찾는 보고로서 중요시되고 있다.

또한 기원전후 4∼5세기에는 <그리스소설>이라고 불리는 연애이야기가 유행했다. 주인공인 미남·미녀가 갖가지 위험에 직면하면서도 순수한 사랑을 관철하고, 최후에는 행복스럽게 맺어진다는 천편일률적인 내용으로, 전해지는 수편의 작품 가운데 헬리오도로스의 《에티오피아 이야기》, 롱고스의 《다프니스와 클로에》가 특히 유명하다.

[근대그리스문학]

1453년 비잔틴제국의 붕괴에서 현대에 이르는, 그리스어(語)를 사용한 문학. 오스만제국 지배시대(1453∼1821)에는 이렇다하게 내세울 수 있는 작품은 없었고 단지 베네치아 지배하의 크레타섬에서 민요·희곡 등이 성행하였던 것이 전부였다. 19세기에 들어와서 민족독립의 기운이 높아짐과 동시에 문학활동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그리스에서는, 고전(古典)에서 뿌리를 찾는 문장어(文章語)와 일상의 대화와의 차이가 극단으로 벌어져 있어, 문학자의 대다수는 구어(口語)를 문학언어로 높이기 위하여 고투(苦鬪)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세기에는, 먼저 이오니아파의 시인 D. 솔로모스가 《자유의 찬가(1823)》로 새로운 시대의 개막(開幕)을 고하고, 신아테네파의 시인 K. 팔라마스는 운문(韻文)을 철학적인 것으로 높였다. 그를 이어서 A. 시켈리아노스와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K. 카바피스가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다.

또한 G. 세페리스와 O. 엘리티스가 제2차세계대전 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산문으로는, 1930년대에 구어를 기초로 한 문장어가 거의 확립되고, 주목할 만한 작가로서 S. 미리벨레스와 I. 베네지스가 제1차세계대전과 그후의 전쟁의 체험을 묘사해서 반향(反響)을 불러일으켰다. 시인으로서 유명한 N. 카잔차키스는 소설 및 에세이로써 그리스의 테두리를 넘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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